초기제중원의 선교사들

초기 내한선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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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건
기사입력 2023-09-15 [10:36]

제중원 선교사들의 역할

 

알렌의 제중원 개원 이래로 에비슨이 제중원을 선교회 기관으로 새롭게 출범시킬 때까지 활동한 선교사들은 모두 10명이었다. 에비슨이 제중원을 완전히 선교회 소관으로 이전하고 세브란스병원으로 이름을 바꾸기 전까지 이 과정에 합세한 이들도 10명이나 된다. 이중 에비슨과 하디는 캐나다 출신이었고, 그 외는 모두 미국인이었다. 분쉬(Richard Bunsch)는 독일인으로 에비슨의 요청에 따라 잠시 제중원에서 외과치료를 도우며 일했지만 선교부에서 파송된 사람은 아니었고, 고종과 왕실의 주치의란 명분에서 행한 일이었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그를 제외하였다. 고든(Henry Bauld Gorden)은 비록 건축가였지만 선교부 파송으로 왔기 때문에 이 논의에 포함 시켰다. 언더우드의 경우에는 의료 선교사로 내한하지는 않았지만 제중원 교사 자격으로 내한하여 제중원에서 의사 보조원, 간호사, 약제사, 의료행정 사무, 공사관 교사로 활동하며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 그의 부인도 여의사여서 내조의 공이 컸다. 그보다도 언더우드가 캐나다의 유능한 에비슨 의사를 한국에서 일할 선교사로 불러들이고 시종 그와 협력하여 병원을 확장하고 의과대학을 발전시키는데 적극 협력하여 제중원과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다.

 

(1) 알렌(Horace N. Allen, 安連, 1858-1932)

 

알렌은 최초로 한국에 상주하기 시작한 개신교 선교사였다. 제중원의 산파역을 했고 초대 원장으로 또 외교관 활동을 한 후에도 다시 돌아와 봉사했다. 그는 1858423일 미국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Delaware)에서 태어났다. 1881년 에는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Ohio Wesleyan University)을 졸업하였다. 재학시절에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의학공부를 하게 되었다. 1883년 신시내티에 있는 마이애미 대학교(University of Miami)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중국선교사로 갔으나 중국인의 서양인 학대를 견디지 못하였다. 이곳저곳을 방황하다가 임지를 한국으로 바꾸어 1884920일에 내한한 후 미국공사관의 전속의사가 되었다.

알렌이 이룬 최대의 공로는 무엇보다도 제중원의 설립과 조수 양성을 위한 의학교육 실시였다. 그는 민영익 치료를 개인적인 성취의 기회로 삼지 않고 의료선교사로 적절하게 소임을 다함으로써 한국선교의 발전을 위해 큰 공적을 길이 남기게 되었다.

그는 의료선교사였지만 입국 초기에는 선교사인 사실을 들어낼 수 없어서 미국 공사관의 공의란 사실을 내세웠다. 그러나 한국이 장차 기독교 국가가 될 그 날을 보기 위해 살고 싶다(I hope to live to see the day when she shall be a Christian nation)” 피력할 정도로 뚜렷한 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었다. 선교본부에 보낸 다른 서신에서도 그의 의료선교관을 볼 수 있다.

 

어떤 선교사들은 병원이 선교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이 병원을 운영하려 합니다. 그러나

병원은 선진화된 서양 문명의 첫 단계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어떤 선교일도 이 나라에서

허락되지 않은 것을 고려 할 때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기관을 선교사로 알려진 사람의

손에 넘겼고 이와 같은 다른 봉사도 수락합니다. 어느 선교 단체든 의사를 공급하는 것은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갑신정변을 계기로 서양 의술의 우수성을 입증한 후에는 병원과 부속 의학교 설립을 위해 앞장서서 노력하여 결실을 보았다. 초대 제중원 원장이 되어(1885. 4-1887. 7) 이 병원을 이끌어갔다. 제중원의 첫해 활동을 미국 해외선교부에 보고하여 제중원에 관한 중요한 기록도 남겼다. 혜론의 건의를 수용해 여의사를 초빙하여 부녀과를 신설하는 등, 초기에 다대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콜레라가 전염병으로 전국을 휩쓸었을 때 예방법을 알리고 위생에 주의할 것을 당부하며 병에 대한 미신적인 인식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하여 대민 계몽활동 부분에서도 공헌하였다.

그는 고종과 민비의 주치의가 되어 조선 정부로부터 1886년에 당상관, 통정대부,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직책들을 받았다. 18878월에 주미조선공사관(駐美朝鮮公使館)의 초대 전권대신(全權大臣)인 박정양(朴定陽, 1841-1904)을 보좌하는 참찬관(參贊官)이 되어 제중원을 떠났다. 1889년에 6월에 혜론의 사후에 다시 제중원 원장역을 맡기도 했다(1890.8-1891.4). 189079일에는 주한 미국 공사관에서 근무하게 되어 제중원을 다시 떠났다. 후에 공사가 되어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미국공사로서 그는 한일강제 병탄 때 태프트와 가츠라의 밀약에 따르지 않고 망국의 한을 진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여 파면되었다. Korean Tale(1889), Korea Fact and fancy(1903), KoreanAmerican Relations(1904), Things Korean(1908) 등의 저서도 남겼다.

 

(2)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元杜尤, 1859-1916)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회가 한국에 목사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였다. 의사가 아니었지만 제중원에서 알렌을 도와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토론토 의대의 에비슨을 한국 선교사가 되도록 일조하고 직간접으로 제중원 발전을 위해 에비슨과 협력하여 후견인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는 영국 태생이었다. 그는 소년시절에 프랑스에서 공부하기도 했고 가족의 미국이주로 뉴욕에 정착하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뉴브룬스윅 신학교를 마쳤다. 신학교 재학 시절에 선교사 되기로 결심하고 인도에 가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온 올스만(Oltsman) 박사의 강연을 듣고 한국에 관심은 갖게 되었다. 한국에 갈 지원자가 없는 것을 알고 주변의 조언에 마음이 변화되어 한국에서 자기를 부른다는 느낌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한국행을 결심하였다.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1884728일에 한국선교사로 임명 받고 그해 12월에 뉴욕을 떠나 188545일 부활절 오후 3시에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안수 받은 한국 상주 성직자 선교사로서는 그가 가장 먼저 내한하였다. 도착한지 며칠 후에 제중원이 개원하자 개원 초부터 제중원에 합류하였다. 언더우드는 의학공부도 1년간 했던 경륜이 있어 제중원에서 진료 보조, 약제사, 간호사 역할을 하였다. 의학생들에게 물리학과 화학 등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언더우드는 의료선교 활동을 선교지에서 효율적인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일본선교 초기에 북장로교 선교부로 부터 파송 받아 1859년에 요코하마에 도착한 헵번(James C. Hepburn) 의료선교사와 한국의 첫 선교사로 내한한 알렌 의사를 보며 의료선교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여 후에 선교전문 잡지에 글도 발표하였다. 의료 활동 자체가 선교라고 보았다. 의료 활동은 선교지에서 고통의 완화와 질병 치료에서 시작하여 영혼 치유와 영혼구원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는 제중원이 양반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도 선교활동에 유익을 준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의료선교가 복음전파에 충실한 시녀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한국선교역사를 쓰면서 의료선교가 이룬 다섯 가지 공로를 1) 국왕의 호의 획득, 2) 종두법의 소개, 3) 서울에 전염병 치료하는 병원 설치. 4) 콜레라 유행 시 헌신적인 간호, 5) 청일전쟁 후 평양에서 홀을 비롯한 선교사들이 행한 희생적인 봉사라고 정리하였다.

한편 그는 영한ㆍ한영사전을 만들고 문법책과 회화 책을 펴내어 한글의 대중화와 한국 근대화에도 많은 기여를 했으며 성경번역, 찬송가 편찬, 그리스도신문간행, YMCA와 조선기독교서회 창설 등으로 한국교회의 초석을 놓았다. 그의 형 존(John T. Underwood)도 배후에서 거의 반세기 동안 동생의 한국선교 사역을 위해 재정지원과 기도와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선교의 동역자 역할을 하였다.

그는 1882년 제중원의 부인과 의사로 파송 받아온 호톤과 결혼하여 제중원 발전에 외조하기도 하였다. 후에는 토론토에 가서 에비슨을 선교사로 초빙해 와서 그가 제중원을 개편하여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로 발전시키는 데 간접적으로 공헌하기도 하였다. 언더우드는 1900년 뉴욕에서 열린 선교대회에 참석은 못했으나 글로서 이 병원의 활동상을 알렸다. 이러한 노력들은 의료선교의 효율성과 병원을 살리려 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3) 스크랜턴( William B. Scranton, 施蘭敦 1856-1922)

 

스크랜턴이 제중원에서 활동한 최초의 북감리교 선교부 파송의료선교사였다. 제중원에서 기간은 3개월반 정도였다. 그는 코네티컷 주 뉴헤이븐에서 태어났다.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1882년 뉴욕의 콜럼비아대학교 의과대학을 마친 후에 오하이오 주의 클리브랜드에서 개업하였다. 애초에는 선교사가 되기를 거부했으나 투병생활 중에 마음을 바꿔 미국 북감리회에서 의료선교사로 내한하게 되었다. 그의 부인과 후에 이화여대를 창설한 그의 어머니 메리(Marry F. Scranton) 여사와 함께 한국에 왔다. 실질적으로 아펜젤러 보다 먼저 서울에 상주하는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가 되었다. 뒤에 서울에 온 아펜젤러의 집을 구하고 정착을 하는데도 도움을 주었다. 그는 제중원의 일이 분주함을 보고 알렌의 초청으로 1885522일부터 그곳에서 함께 일하였다. 주로 환자를 마취시키는 일을 도왔다. 그러나 제중원 조직과 알렌 밑에서 일하는 것을 수긍하지 않았고, 선교활동이나 제중원 운영방식에 대해서도 이견을 보였다. 서민을 위한 병원의 운영을 비롯해서 성격 면에서도 그들 간에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곧 혜론이 내한하게 되었고, 그해 624일에 감리교 중심의 민간병원 설립을 계획하고 제중원을 떠났다. 이후 1885910일부터 정동의 자기 집에서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이곳이 1886미국의원의 시()병원’(American Doctor's Dispensary)으로 후에 상동병원이 되었다. 이 병원은 서민층의 진료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진료하였다. 1887년에는 여자들을 위한 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세웠고, 또한 상동교회도 설립하였다. 1907년에는 조선을 떠나 일본에서 활동하며 말년을 보냈다.

 

(4) 혜론(John W. Heron, 惠論, 1856-1890)

 

혜론은 제중원 2대 원장을 지낸 의료선교사였다. 그는 1856615일 영국에서 태어났으며, 14때 회중교회 목사인 부친을 따라 미국테네시 주의 녹스빌로 이민을 갔다. 매리빌 대학(Marryville College)을 졸업하고 4년 동안 교직생활도 하였다. 1883년에 테네시대학교의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 후 존스보로에서 18개월간 개업의로서 활동하였다. 뉴욕대학교의 의과대학에서도 공부했고 블랙웰 아일랜드 병원에서 실습도 하였다. 그는 테네시의대의 교수직 제안을 사양하고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여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1884년 봄에 최초로 한국선교사로 임명 받았다. 그러나 임지 부임은 알렌이나 언더우드보다도 늦어져서 부인 해티(Hattie Elizabeth Gibson)과 함께 1885621일에 도착하였다. 그의 부인도 의사 가문 출신이었다.

혜론은 그때부터 189075일까지 제중원에서 활동하였다. 제중원에서 백내장 수술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술하여 성공시킨 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알렌과 더불어 의료기술문제와 더 나아가 선교방향 문제로 갈등을 빚고 많은 괴로움을 겪었다. 알렌은 조선의 정세를 고려하여 의료 활동을 통한 신중한 선교를 주장한 반면에 그를 비롯한 여타의 선교사들은 더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복음전파 활동 을 주장한 것이 주요인이었다.

혜론은 알렌이 18879월 조선공사관의 참찬관 자격으로 제중원을 떠난 후에 제중원의 2대 원장이 되었다. 아울러 고종의 시의 역할도 하였다. 그는 제중원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까지 공식 근무를 하면서 하루 60-70명의 환자를 돌보았다. 성경번역에도 참여하고 문서전도에도 관심이 많아 한국성교서회 창설에도 공헌하였다. 그는 정부로부터 이미 통정대부(通政大夫)직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건강이 악화되었는데도 멀리 떨어진 시골까지 가는 무리한 왕진활동을 감행하다 결국 189072634세의 청년으로 이질(痢疾)에 걸려 사망하였다. 고종은 서양인의 묘지구역으로 양화진의 땅을 하사하여 거기 묻힌 첫 외국인이 되었다. 그가 이 무렵에 내한한 서양인으로는 맨 처음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의료선교사의 사명의식과 기독교 복음전파라는 궁극적 목적의식을 갖고 있었다. 혜론은 지적이었고 열성도 있었으며, 의사로서 소임을 다하다가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행할 헌신의 모범을 보여주었고, 한국 개신교 선교의 기틀을 다지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마펫은 1934년 북장로교 한국선교회의 희년 기념식에서 혜론을 이상적인 의료선교사라고 칭송했다.

 

(5) 엘러스(Annie. J. Allers, 房巨夫人 1860-1938)

 

앨러스는 제중원에서 활동한 최초의 여자 의료선교사였다. 그녀는 미국 미시간 주 벌오크(Burr Oak)의 목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1881년에 일리노이 주에 있는 록포드(Rockford)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톤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한 후에 의과대학에서 수학하였다. 남자 의사의 여자 환자 진료가 불가능했던 당시 한국의 상황에서 알렌의 요청으로 의학교육을 받은 간호사로서 여성의료사역을 위해 188676일에 내한하였다. 한국 의료선교사상 최초로 제중원 내에 만들어진 부인과에 여성 환자만을 위한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 후 정이품 정경부인의 직급도 받았고, 명성황후의 어의로도 활동했으며, 정이품 격인 정경부인의 직급을 하사 받았다. 육영공원에서 근무한 적도 있었다. 선교현장에 근무하면서 의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을 느끼고 보습 할 기회를 바라며 일했다. 배재학당 교장을 역임한 감리교 선교회의 벙커(Dalzel A. Bunker, 房巨)와 결혼한 18877월 이후에는 병원 일을 사임하였다. 엘러스는 언더우드처럼 한국어를 다른 선교사들 보다 비교적 빨리 습득하였다. 불어를 구사할 수 있어서 당시 프랑스인 가톨릭 선교사들이 편찬했던 한불사전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 그 한 이유가 되었다. 이승만의 개인 영어교사 역할도 하였다. 북장로교 안에서의 선교사역은 그 후에도 계속하였고, 정신여학교를 설립하여 초기 한국 여성교육에 크게 공헌하였다. 서울 YWCA의 창설에도 공헌하였다.

 

(6) 호톤(Lillias S. Horton Underwood,1851-1921)

 

호톤은 정규 의과대학을 나온 여의로서 부녀 진료에 공헌했다. 언더우드와 결혼하여 한국교회의 초석을 놓는데 많은 협조를 했고 그 기록들을 남겼다. 그녀는 뉴욕주 알바니에서 출생하였다. 경건한 신앙가정에서 자란 호톤은 인도 선교사의 체험담을 듣고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쉬카고에서 여자의과대학(The Women’s Medical College of Chicago)을 졸업하고 시카고 아동병원에서 근무하였다. 1888327일에 의료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여자 의사가 당시 미국에서도 극소수여서 활동할 기회가 많았는데도 굳이 한국선교사로 내한했던 것은 선교사 소명의식 때문이었다. 호톤은 제중원을 사임한 앨러스를 이어 공석이 된 부인과를 맡았다. 1891년에 와병으로 잠시 미국에 귀환했다가 혜론이 죽은 후 빈튼이 부임할 때까지 공백기를 메꾸기도 하였다. 대외적으로 왕실과는 민비의 시의가 되었으며, 원세개의 가정의도 겸하였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한편으로 집 부근에서 시약소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또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위해 휴 오닐 2세 기념진료소를 세워 독자적인 활동을 하기도 했다.

1889년 봄에는 8년 연하의 언더우드와 결혼하여 북한지역으로 신혼여행을 겸한 선교지 탐방여행을 하였다. 안전이나 맹수의 공격 같은 여러 면에서 신변의 위험이 있었지만 이를 무릅쓰고 외국인 부부로서는 최초로 북한여행을 감행하여 북한선교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서양인에 대해 반감을 가진 지방 관리나 주민들도 만났고 맹수의 위험도 있었지만, 가는 곳마다 의료활동을 펴고 전도책자를 배포하여 복음 전파의 문을 열었다. 수많은 환자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들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봉사하는 데에만 전념하였다.

호톤은 저술활동에도 힘써 Underwood of Korea,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With Tommy Tompkins in Korea 등의 저서를 남겨 언더우드와 본인의 한국선교활동을 정리하여 그 연구를 위한 소중한 자료를 남겼다. 또한 수년간 The Korea Mission Field의 편집장을 맡아 대외적으로 한국선교 현황을 소개하고 친한적인 입장에서 한국을 옹호하기도 하였다.

 

(7) 파워(Charles Power, 1855-1904)

 

파워는 북장로교회 의료선교사로 파송 받아 제중원에서 일했다. 188811월에 내한하여 188812월부터 제중원에 혜론과 함께 근무를 시작하였다. 사교성이 좋았고 한국어를 조금 구사할 줄 알게 되면서 한국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였다. 실력이 있는 의사였지만 신앙생활, 성수주일, 음주 여러 행동들이 문제가 되어 선교사들 사이에서 조사를 받은 후 18897월에 사임하였다.

 

(8) 하디(Robert. A. Hardie, 河鯉泳, 1865-1949)

 

하디는 의료선교사였으나 오히려 부흥운동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그는 온타리오 주의 칼레도니아 태생이다. 토론토대학 의대를 졸업하였다. 토론토대학 YMCA의 파송을 받아 내한한 하디는 18909월 한국에 도착하였다. 10월부터 부산에서 의료선교사 활동을 시작하고 거기 정착하기를 원했지만, 1891년 정초부터 4월까지 제중원의 책임을 맡아 근무하였다. 이 기간은 혜론 사후에 알렌이 제중원으로 복귀하였다가 18907월에 다시 참찬관이 되어 제중원을 떠나 병원운영과 의료진 구성에 차질을 빗고 있을 때였다. 에비슨과 토론토의대 동문인 그는 의대를 졸업했지만 진료경험이 없어 본인도 환자들도 진료를 원치 않아 곧 임지를 옮기게 되었다. 에비슨의 제중원 발전책에 따라 18975월부터 9월까지 그리고 1898-99사이에 다시 돌아와 일하기도 하였다. 토론토대학 YMCA와의 선교후원 계약기간이 만료된 후에 미국 남감리회로 이적했다. 그 후 1903년 원산부흥운동의 주역이 된 이래 의료 활동 보다는 부흥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영향을 주어 1907년 대부흥운동의 발생을 견인하였다. 1909년에는 협성신학교 교장직도 수행하였다.

 

(9) 빈튼 (Cadwallader C. Vinton, 賓頓, 1856-1936)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하디에 이어 제3대 제중원 원장 직을 맡았다. 18914월에 부인과 함께 내한한 빈튼은 제중원 운영비 문제와 선교방법 문제로 다른 선교사들과 한 차례 갈등을 초래하였다. 그는 조선의 정황을 무시하고 선교에 열정을 가져 직접 전도를 행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의학교육도 조선인은 과학적인 교육을 받을 만한 두뇌를 갖지 못했다는 인종적 이유로 반대하였다. 한국 관리의 전횡에 맞서 제중원의 재정관리 문제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가 실패하고, 약값 유용, 제중원 내 예배실 부재, 전도활동 불가 등의 이유에서 1892년 자택에 진료소(Walder Dispensary)를 개소하고 전도활동을 병행하였다. 그는 의료사업이 복음전파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점을 인지하고 이를 십분 활용하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이 진료소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면서 제중원이 공중분해 될 위기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 정부 측에서 볼 때 빈튼이 1891년에 제중원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후로 여름이면 휴가차 병원 문을 닫고 겨울이면 추위 때문에 우천 시에는 일기불순으로 치료를 꺼리는 등의 근무태도 불량으로 말썽을 빚어 병원을 떠났다. 그러나 그 후 1896년에는 에비슨과 더불어 의사양성 교육에 동참하였다. 1898년 가을과 18993-10월에 안식년 휴가를 맞은 에비슨을 대신하여 제중원에서 환자를 돌보기도 하였다. 여의사의 양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는 선교 일에 관심이 많아 그리스도신문, The Korea Field 등의 출판 사업에 많은 힘을 기울였고, 나병 구호사업에도 투신하였다.

 

(10) 에비슨(O. R. Avison, 魚丕信, 1860-1956)

 

에비슨은 제중원 역사와 한국에서 서양의학 발전에 최대 공헌자다. 제중원의 중흥과 세브란스 병원과 의과대학으로 발전하게 한 주역이었다. 그는 영국 요크 주에서 태어났으나 가족을 따라 18666세 때 캐나다 온타리오 주로 이주하였다. 토론토 대학의 안정된 교수직을 그만두고 한국선교사로 와서 헌신 하고 은퇴 후에는 미국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나그네 인생의 여정 속에 한국의 의학과 교육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청소년 시절에 약방에서 일하며 학교도 다녀 후에 토론토대학의 약대 교수로 활동하였고, 토론토대학 의대를 마친 후에는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토론토대학 YMCA운동에도 적극 가담했던 에비슨은 하디와 게일의 한국 선교사 파송에 참여하였다. 후에 언더우드를 만나 그의 권고를 받고 교수와 의사로서의 기득권을 버리고 그 자신이 한국 의료선교사를 지원하여 18934월에 캐나다를 떠나 부산을 거쳐 8월말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에비슨은 내한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고종의 피부병을 치료하여 주치의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혼자서 왕실의 주치의로 활동하였다. 에비슨은 언더우드와 의료와 교육 선교에 뜻을 같이하고 협력했다. 특히 평양지회의 동료선교사들이 병원의 확장과 서울에 대학설립을 극구 반대 할 때 상부상조했다.

그는 전술한대로 제중원의 기틀을 바로잡고 조선정부의 국립병원 체제를 선교부가 주도하게 만들었다. 제중원 의학교도 정상화되어 1899년에는 해부학 교재를 만든 것을 필두로 다른 분야의 의학교과서를 만들어 의학교육에 박차를 가했다. 1900년에는 뉴욕의 선교대회에서 한국의 의료선교에 대한 연설로 세브란스의 기증을 받게 되어 병원을 신축하고 양적ㆍ질적인 발전을 이룩해 오늘날의 세브란스병원을 이루는 데에 초석 놓는 역할을 하였다. 그의 부인(Margaret Jenie Barnes Avison, 1862-1936)도 간호업무를 도왔고, 병원은 물론 밖에서도 여자들에게 전도했다. 목요일 밤마다 여러 계층의 한국인들을 초청하여 한국문화를 익히며 문화교류에도 힘썼다. 그의 자녀들 가운데 3명이 또한 한국선교사로 봉사하였다.

 

(11) 어빈(C. H. Irvin, 魚乙彬, 1862-1933)

 

어빈은 북장로교 선교부 파송을 받아 189311월말 에비슨의 병원확장 계획에 따라 부인(Bertha K.)과 함께 임명되어온 첫 의사였다. 제중원에서 에비슨을 돕다가 부산에서 활동하던 브라운(H. Brown)이 병으로 귀국하자 부산 지방으로 전임되었다. 그는 부산에서 활동하는 동안 구라선교를 개척하였다.

 

(12) 화이팅(Georgiana Whiting, 吳婦人, 花伊滕, 1869-1952)

 

그녀는 매사추세츠 주 몬슨에서 태어났고, 그곳의 몬슨아카데미(Monson Academy)를 나와 그 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학생선교자원운동(SVM)의 진원지인 노스필드(Northfield)신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여자의대(Women’s Medical College of Pennsylvania, 1890-1894 수학)을 졸업하였다. 의대 재학 중에 선교사가 되기를 지망하여 제중원에 간호사로 오는 제이콥슨(Jacobson) 양과 함께 189446일에 내한하였다. 제중원에서 영어, 생리학을 가르쳤고, 재정책임자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한국어 선생은 이승만이었다. 1900년에는 남장로교 선교회의 오웬(Clement C. Owen)과 결혼하고 남장로교로 이적하면서 제중원도 사임하였다. 광주 수피아여자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13) 피쉬(Mary Alice Fish, 1870-1912)

 

피쉬는 네바다 주 버지니아시티(Virginia City)에서 출생하였다. 그 가문은 5대에 걸친 장로교 목사 집안이었다. 캘리포니아 주의 산라파엘(San Rafael)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장로였으며, 어머니는 청교도 가문 출신이었다. 산타로사(Santa Rosa) 신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여자의대에 입학해 공부하다가 쿠퍼의대(Cooper Medical College)를 졸업하였다. 필라델피아 병원에서 인턴을 마친 후에 무디성경학교와 스코필드(Scofield)성경학교를 마쳤다. 피쉬는 189711월 제중원에 부임한 후, 평양으로 전임되었다가 1899년 마펫( Samuel Austin Moffett)과 결혼하였다. 평양에서 1904년에 맹인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질에 걸려 1912712일에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4) 필드(Eva Field, ,1868-1932)

 

필드는 에비슨의 병원 확장 정책에 따라 내한하여 한때 병원을 떠나기도 하여 실제적 활동기간은 짧았다. 그녀는 아이오와 주의 드 모인(Des Moines)에서 출 신이었다. 1896년 시카고여자의대(Woman’s Medical College of Chicago)를 졸업하고 쿡카운티(Cook County)의 메리톰슨병원(Mary Thompson) 병원에서 인턴생활을 하였다. 18971014일에 내한하여 제중원에 부임하였다. 1899년에 에비슨이 안식년으로 캐나다에 갔을 때는 쉴즈와 함께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다. 1901년에 전도활동에만 전념하기 위해 병원을 떠났다. 1908년에는 최초의 시편 번역자인 유대인 북장로교 선교사 피터스(Alexander A. Pieters, 彼得, 1872-1958)와 결혼했다. 1926년에는 세브란스병원 소아과에 근무하였다. 1932년에 필드가 죽자 피터스는 아내를 기념하기 위해 세브란스병원에 대수술실을 마련하다.

 

(15) 샤록스(Alfred M. Sharrocks, 謝樂秀, ?-1919)

 

샤록스는 제중원에서 활동은 1년여였다. 그는 미주리 주의 파크대학을 졸업하였다. 1899929일 북장로교 선교부의 의료선교사로서 부인과 함께 내한하였다. 내한 후 제중원에서 근무하면서 에비슨을 도와 해부학, 생화학, 생리학, 약물학, 세균학, 위생학 등의 교과서들을 편찬하였다. 1900년에 평양지회로 옮겨가 주로 북부지방에서 활동하였다. 1917-1919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하교 이사로 활동하였다. 그의 딸 엘라(Ella)1926년 내한하여 세브란스병원에서 교수와 간호과장을 역임하였다.

 

(16) 아버클(Victoria. C. Arbuckle)

 

아버클은 제중원의 활성화를 위해 에비슨이 미국 남북장로교 선교부에 간호업무를 맡을 미혼 여성을 요청함에 따라 1891921일에 북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내한하였다. 제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다가 1896년 헌터(Hunter) 결혼하고 사직하였다.

 

(17) 테이트(Mattie Samuel Tate, 崔馬太, -1940)

 

테이트는 짧은 기간 간호사로 일했다. 1891년에 안식년을 맞아 미국 체류 중인 언더우드가 매코믹신학교에 와서 한 강연에 감동을 받아 한국 선교사가 되기를 자원하였다. 그녀는 오빠와 함께 18922월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임명을 받아 113일 내한하였다. 서울에 체류하면서 한국어 공부를 하며 부녀자 대상의 전도활동을 하던 중에 에비슨이 제중원에서 환자를 돌볼 미혼 여성을 필요로 하여 제중원에서 짧은 기간 동안 간호업무에 종사하였다. 1894년부터는 전주에서 여성사역에 종사하였다.

 

(18) 제이콥슨(Anna P. Jacobson, 雅各善, 1868-1897)

 

야곱센은 간호사로 약 두해동안 헌신하다가 요절했다. 그녀는 노르웨이 태생으로 루터교회에서 자라났으나 장로교인이 되었다.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준비했으나, 부모들의 강한 반대와 결혼 강요로 인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메인 주의 포틀랜드에 있던 메인종합병원(Main General Hospital) 간호학교에서 간호교육을 받았다. 재학 중에 선교사로 지망하여 189446일에 내한하였다.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파송 받은 최초의 정식 간호사인 그녀는 제중원에서 간호학, 붕대법, 안마 등을 가르쳤다. 1895년 서울에 코레라가 만연했을 때 화이팅과 에비슨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제중원에서 3년간 환자 치료를 위해 주야로 고생하다가 아메바성 간농양으로 1897년에 29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에비슨은 그를 기념하여 병원에서 활동하는 여자선교사의 숙소 건립을 서둘렀다.

 

(19) 쉴즈(Esther Lucas Shields, 秀日斯, 1868-1941)

 

쉴즈는 간호사양성의 선구자였다. 그녀는 1868년 펜실배니아주의 테이로어빌(Taylorville)에서 장로의 딸로 태어났다. 1891년 필라델피아병원 간호원양성학교(Philadelphia Hospital training school for Nurses)를 졸업하고 세인트티모디병원(St. Timothy Hospital)에서 1년간 간호훈련과정을 마쳤다. 북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18971014일에 내한한 후, 제중원에서 간호 업무와 전도를 담당하다가 의학생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01년에는 격무로 탈진하고 신경쇠약에 걸려 평양에 가서 요양하며 전도활동을 하였다. 한 동안 전도에 전념하다가 1904년부터 세브란스간호양성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다. 그녀는 간호사에 대한 이식과 간호사 스스로 자기 인식이 없던 때에 12가지 간호사 생활 수칙을 만들고 거기 준하는 생활 관습을 통해 직업의식을 갖도록 교육했다. 1906년부터 1923년까지 세브란스의대 간호학교 초대교장으로 봉직하였다.

 

(20) 고든(Henry Bauld Gorden, 1855-1951)

 

고든은 의사도 아니고 선교사도 아니었으나 병원 신축의 설계를 했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 출신의 저명한 건축가로 낙스 장로교회를 비롯한 많은 건축물을 설계하였다. 그는 안식년을 맞아 고국 캐나다로 돌아간 에비슨으로 부터 병원을 신축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에비슨의 요청에 따라 40명 수용 규모의 설계도를 무료로 작성해주었다. 제중원 신축을 위해 그 후 장기간 토론토의 건축회사를 떠나게 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파송 받아 1901년에 내한하였다. 북장로교 선교부와의 계약에서 여비를 포함한 연봉 $3,000가 책정되었으나 계약기간의 연장과 같은 변화하는 형편에 따라 조정되었다. 에비슨은 그 실질적 재정 부담은 세브란스임을 암시했다. 원래 1년 계약이었으나, 조선 정부로부터 대지구입 문제를 비롯한 병원건축문제에 원활한 협조를 받지 못했고 러·일전쟁등으로 공사가 지연 되었다. 따라서 그는 3년간 한국과 중국에서 체류하고 19047월에 돌아갔다. 그가 한국에 체류한 때는 중국에서 의화단사건으로 파괴된 교회들과 선교관련 건물들을 재건할 무렵이었다.

에비슨은 1900년 뉴욕의 에큐메니컬 선교대회에서 연설한 후 클리블랜드의 거부 세브란스를 만났을 때 고든의 설계도와 추정한 비용을 토대로 새로 지을 병원의 예상 건축비를 $10,000이라고 말했다. 그 제시에 따라 세브란스의 희사로 새 병원의 건축이 시공되었다. 물가의 변동으로 비용이 증가 되었을 때 세브란스의 추가 희사로 병원은 완공되었다. 공사는 중국인 헤리 장(張時英)이 맡았다. 고든은 한국에 있는 동안 세브란스병원 외에도 서울 새문안교회, 연동교회, 중앙교회, 정신학교, 경신학교와 여러 선교사 주택 등의 건축에 관여하였다. 신앙심도 깊어 외국인 주일학교 감독이 되어 성경공부반의 리더로 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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